디지털 장의사 활동에 필요한 기록보존 가이드라인
1. 기록을 지우는 직업에 왜 ‘보존’이 필요한가?
디지털 장의사는 보통 ‘기록을 삭제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의 계정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데이터를 삭제하며,
유족의 요청에 따라 온라인 흔적을 지우는 것이 주요 업무로 인식된다.
하지만 실무에서 디지털 장의사가 실제로 하는 일은
‘모두 삭제’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워야 하는지 판단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록을 일시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삭제 전 유족 간에 의견이 갈리는 경우,
법적 분쟁을 고려해 증거 보전을 해야 하는 경우,
삭제를 요청한 의뢰인이 며칠 뒤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경우 등
‘지우기 전, 잠시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많다.
더불어 디지털 장의사는 단순 고객의 요청에 따라 행동할 수 없다.
삭제 행위 자체가 누군가의 권리, 명예, 재산권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책임 있는 판단과 보존 근거가 동반되어야 하며,
이 근거를 체계적으로 저장하고 관리하는 것이 바로 ‘기록보존 가이드라인’의 핵심이다.
2. 디지털 장의사 업무에 필요한 기록보존 범위와 항목
디지털 장의사가 실제 업무에서 반드시 보관해야 할 정보는 크게 다음과 같다.
① 의뢰 이력 및 서면 동의 관련 문서
- 고인의 사망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유언장 사본
- 의뢰인의 신분증, 위임장, 계약서
- 작업 범위 및 삭제 요청 확인서
⟶ 이는 작업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핵심 문서로,
- 법적 분쟁 시 책임 소재를 입증하는 데 사용된다.
② 삭제 전 원본 백업 기록
- 이메일, 클라우드, 메신저 내역 등
⟶ 삭제 전, 고객 요청으로 일부 또는 전체 백업이 이뤄지는 경우
그 원본은 일정 기간 암호화된 저장소에 보관되어야 한다.
보관 기간은 보통 30일~90일로 설정되며, 이후 자동 폐기 가능.
③ 작업 로그 및 수행 내역
- 작업 시간, 작업자 이름, 삭제된 파일 및 계정 목록
- 각 플랫폼별 요청 및 응답 기록(이메일, 고객센터 대응, 삭제 승인 이력)
⟶ 이는 고객 응대 외에도, 업체 내부 품질관리 및 분쟁 방지를 위한 중요한 데이터다.
④ 유족 또는 제3자 이의 제기 및 대응 기록
- 가족 간 이견 발생 시 상담 기록
- 삭제 지연 사유 및 변경 요청 내역
- 법률 자문 기록(있는 경우)
이러한 기록은 모두 디지털 장의사의 ‘업무 방어 수단’이자
서비스 신뢰 확보의 기초 인프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민감한 데이터를 다루는 만큼,
기록 자체를 보관하는 방식에도 보안성과 절차적 정당성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개인정보보호법 제29조에서는
“개인정보 취급자는 처리기록을 명확히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이 조항은 디지털 장의사 서비스에도 사실상 적용 가능하다.
즉, 단지 유족의 요청이라는 이유만으로
임의로 계정을 삭제했다가는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3. 실무 중심의 기록보존 가이드라인 설정 방법
디지털 장의사 서비스는 아직 제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법정 보관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각 업체는 스스로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업무 기록을 보관해야 한다.
여기서는 실제 현장에 적용 가능한 기록보존 가이드라인 예시를 제시한다.
1) 보관 기간 기준
- 민사적 분쟁 가능성이 높은 경우: 1년
- 고객이 최종 삭제 확정서를 제출한 경우: 30일
- 의뢰 중 이의 제기가 있었던 기록: 3년 이상
→ 보관 기간은 기록의 민감도와 법률 리스크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
2) 보관 방식 기준
- 모든 자료는 클라우드 + 로컬 암호화 저장소에 이중 보관
- 문서 파일은 PDF 및 비밀번호 설정
- 영상·사진은 원본 해상도 그대로 보존하며, 추후 열람 기록도 로그로 남길 것
3) 열람 권한 기준
- 작업 책임자만 접근 가능
- 고객 요청 시 이력 공개 가능하되, 사전 동의 필수
- 유족 간 갈등 발생 시 외부 전문가(법률, 심리상담가 등)에게만 공유
4) 자동 삭제 정책
- 작업 완료 후 30~90일 이내 고객 요청 없을 시 자동 삭제
- 삭제 로그는 별도 저장하며, 삭제된 원본은 복원 불가 처리
→ 이를 통해 장의사는 과도한 데이터 축적에 따른 보안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4. 삭제보다 어려운 건, 기록을 어떻게 남길지 판단하는 일이다
디지털 장의사에게 ‘삭제’는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진짜 어려운 건 그 이전의 과정이다.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보관할지, 무엇을 지울지를 결정하는 이 과정은
단순히 기술적 작업이 아니라 감정적·법률적 판단이 동시에 요구되는 복합적인 선택의 연속이다.
기록은 남기기 위한 것 같지만,
때로는 삭제를 위해 잠시 보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순된 상황 속에서 디지털 장의사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명확한 기록보존 기준과 절차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이 곧 신뢰가 되고,
그 신뢰가 디지털 장의사를 하나의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게 만든다.
고객은 기술력이 아닌, 신뢰를 보고 의뢰를 한다.
“이 회사는 기록을 어떻게 관리할까?”
“내 가족의 흔적을 정말 조심스럽게 다뤄줄까?”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서비스가 살아남는다.
그 답은 단지 기술이 아닌 가이드라인과 시스템에서 출발한다.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은 이제
‘지워야 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지워지기 전까지 그 기록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록을 보존하는 건, 누군가의 기억을 잠시 맡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어떻게 보관했는지가,
결국은 그 사람의 직업 윤리를 말해주게 된다.
기록을 지우는 일보다,
지우기 전 잠시 지켜보는 일의 무게가 더 클 수도 있다.
그 순간의 판단을 위해,
오늘도 디지털 장의사들은
하나하나의 로그를 남기고,
하나하나의 동의를 문서로 받고,
지워진 뒤에도 남는 책임을 기록으로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