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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장의사

디지털 장의사의 법적 지위, 왜 아직 제도화되지 못했을까?

mystory-202506 2025. 7. 11. 16:30

1.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직업, 디지털 장의사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물리적인 정리는 장례식과 유품 정리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인의 메일함, SNS 계정, 클라우드 사진, 인터넷 검색 기록은 여전히 살아 있는 듯 기능하고, 타인의 화면에 예고 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디지털 공간에 남은 고인의 흔적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삶의 파편이 된다.

이러한 현실을 정리하기 위해 등장한 직업이 바로 '디지털 장의사'다. 이들은 고인의 디지털 자산을 정리하거나, 유족의 요청에 따라 삭제·보관·이관 작업을 수행한다. 작업 대상에는 블로그, 메신저, 유튜브, 계좌 정보, 심지어는 암호화폐 지갑도 포함될 수 있다. 그들의 역할은 고인의 기록을 단순히 지우는 것이 아닌, 고인의 삶을 마지막으로 정돈하는 매우 민감하고 책임감 있는 업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처럼 사회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디지털 장의사는, 현행법 어디에서도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다. 국가 공인 자격도 없고, 법적으로 보호받는 직업군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디지털 장의사들은 자격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누군가는 소중한 자료를 완전히 삭제당했고, 누군가는 고인의 정보를 허위 업체에 넘겨 피해를 입었다. 이 상황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문제다.

 

디지털 장의사 법적 지위

2. 제도화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디지털 장의사의 법적 지위가 제도화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관련 법률 체계의 준비 부족이다. 현재 대한민국 민법은 유체재산과 일부 무형 자산에 대한 상속만을 다룰 뿐, SNS 계정, 클라우드 사진, 디지털 콘텐츠 등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다. 고인의 유튜브 채널이 수익을 창출하고 있어도, 이를 상속 자산으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불분명한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장의사가 유족을 대신해 계정을 정리하려 할 경우, 플랫폼 측에서는 ‘접근 권한 없음’으로 거절하기 일쑤다.

 

두 번째 문제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이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은 디지털 장의사를 단순한 삭제 대행업체로 인식하거나, 일종의 '해킹 서비스'로 오해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는 서비스의 신뢰도 저하로 이어지고, 실제 필요로 하는 유족조차 서비스 이용을 주저하게 만든다. 또한 제도적 기반이 없는 탓에 디지털 장의사 스스로도 업무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한 채, 유족의 요구에 따라 과잉 행위를 하거나, 법적 충돌 가능성이 있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세 번째 문제는 법률상 정보 접근권과 프라이버시 보호 원칙 간의 충돌이다. 고인이 남긴 계정이나 데이터에 접근하려면 고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고인은 사망한 상태고, 유족이 원한다고 해도 생전 위임장이 없다면 법적으로는 '타인의 계정 침해'로 간주될 수 있다. 이처럼 접근권과 정보 보호 사이의 법적 공백은 디지털 장의사의 활동을 '위법과 합법의 경계'에 놓이게 만든다.

 

3. 해외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리고 한국의 과제는?

해외에서는 디지털 유산과 관련한 법적 제도화가 서서히 진행 중이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디지털 유산 접근법'이 통과되어, 사망자의 계정에 대해 유족이 일정 요건을 갖추면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유럽 역시 개인정보 보호법(GDPR)의 범위 내에서, 사망자의 정보에 대한 유족의 권리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디지털 장의사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일정 조건을 충족한 전문가에게 고인의 정보 접근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디지털 유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법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상태다. 국회 차원에서도 관련 법안이 제출된 사례는 있으나, 법률 제정으로 이어진 전례는 없다. 그나마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디지털 유언장 등록제를 시범 운영하거나, 장례 정보에 디지털 계정 해지 가이드를 포함하는 시도가 있을 뿐이다.

 

한국이 안고 있는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디지털 자산에 대한 정의와 법적 지위의 명확화가 필요하다. 고인의 SNS, 클라우드, 온라인 수익 계좌 등이 모두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상속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 둘째, 디지털 장의사에 대한 자격 기준과 윤리 규정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신뢰성 있는 기관이 이 직업군을 인증하고, 일정 교육 과정을 수료한 이들에게만 활동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셋째, 정보 접근 절차의 명문화다. 생전 위임장, 유언장, 법원의 명령 등 어느 절차를 통해 계정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아무리 디지털 장의사가 유족을 위한 정리를 진행한다고 해도, 불법적인 정보 침해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4. 디지털 장의사의 공백, 법이 응답해야 할 때다

디지털 장의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정리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 화면 너머 남겨진 삶의 흔적들을 하나씩 수습한다. 삭제 버튼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남겨진 계정 하나를 지우기 위해 그들이 검토해야 하는 건 단순한 기술 정보가 아니라, 고인의 의도, 유족의 감정, 법적 책임, 그리고 사회적 윤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층위의 문제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을 책임지고 있는 디지털 장의사는 정작, 법의 언어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유족들은 고인의 이메일을 정리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고, 누군가는 무자격 업체에 고인의 로그인 정보를 맡긴 뒤 데이터 유출이라는 2차 피해를 겪고 있다. 그 빈틈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며, 제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디지털 장의사라는 이름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실존하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이 직업군이 사회적 공감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화되지 못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현행법의 속도다. 기술의 변화는 빠르지만, 법의 반응은 느리다. SNS, 클라우드, 온라인 수익 모델이 일반화된 지금조차, 우리는 디지털 유산이라는 단어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다. 그 결과 디지털 장의사가 하는 일은 ‘기술자’의 영역과 ‘법률가’의 영역, ‘상담가’의 역할을 모두 혼합한 모호한 포지션에 머무르고 있다.

여기에 사회적 인식의 부족도 한몫하고 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은 디지털 장의사를 전문 직종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단순한 ‘삭제 도우미’나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이런 인식은 서비스 제공자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게 만들고, 직업적 자존감 저하로도 이어진다. 법적 보호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수행하는 업무는 언제든 민사적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불안정한 업무 구조는 결국 신뢰 기반 붕괴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일이 갖는 사회적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제대로 정리한다는 건, 단순한 정보의 삭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예우다. 고인이 남긴 흔적을 정돈하고, 유족에게 새로운 시작의 여지를 만들어주는 이들의 작업은, 단지 기술적인 업무가 아닌 디지털 시대의 장례 문화다. 그들이 아무런 기준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일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영역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 디지털 장의사에 대한 공식 자격 기준을 마련하고, 개인정보 보호와 상속법의 경계를 다시 그어야 하며, 정보 접근 절차를 명문화하여 혼란을 줄여야 한다. 생전 디지털 자산에 대한 의사를 남기는 제도—디지털 유언장—도 정식으로 도입되어야 하고, 고인이 남긴 데이터가 무단 삭제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제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디지털 사망’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삶의 흔적, 그것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이들이 바로 디지털 장의사다. 그들이 단지 ‘일회성 서비스 제공자’로 남지 않도록, 법이 응답해야 한다. 그 응답은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철학적 태도의 반영이 될 것이다.

 

디지털 장의사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건 단지 직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기억을 존중하는 사회, 기술과 인간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체계,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문화의 탄생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