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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장의사

디지털 장의사 관련 민사소송 판례

mystory-202506 2025. 7. 10. 15:23

1. 정리의 이름 아래 사라진 기억, 누가 책임지는가?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디지털 공간은 침묵하지 않는다. 메신저는 여전히 알림을 띄우고, 클라우드에는 삭제되지 않은 사진이 남는다. 생전의 감정과 습관, 일정과 메일, 심지어는 고인의 마지막 흔적까지—이 모든 디지털 자산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남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등장한 직업이 바로 ‘디지털 장의사’다. 그들은 고인이 남긴 온라인 계정을 정리하고, 사진을 삭제하며, 때로는 클라우드에 저장된 문서를 유족에게 넘겨주기도 한다. 그들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우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문가’로 인정받는가? 그렇지 않다. 디지털 장의사는 법적으로 규정된 직업군이 아니며, 누구나 ‘디지털 장의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구조다. 이 말은 곧, 법적 책임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들이 수행한 정리 작업이 소송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고인의 의사를 유족과 다르게 해석했을 경우, 혹은 가족 중 일부가 정리에 동의하지 않았을 경우, 디지털 장의사의 ‘정리’는 ‘침해’로 간주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리와 침해, 기억과 삭제 사이에서 민사소송이 조용히 발생하고 있다.

 

디지털 장의사 관련 판례

2. 실제 판례에서 드러난 디지털 장의사의 법적 한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2022년 말, 디지털 장의사 관련 사건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고인의 장남이 가족 회의 없이 디지털 장의사를 고용해 고인의 SNS, 이메일, 클라우드 저장소를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고인이 남긴 가족 사진, 생전 기록 일부, 문서화된 메모들이 삭제되었고, 이를 두고 고인의 장녀가 "공동의 유산이 훼손되었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일부 손해배상을 인정했다.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남아 있다.
“비록 피고가 고인의 의사에 따라 정리를 진행했다는 진술이 있었으나, 유족 전체의 동의가 없었고, 해당 디지털 자산이 가족 전체에게 감정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문장은 디지털 자산이 단지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유족 전체의 정서적 권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법원이 인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디지털 장의사의 판단이 ‘과학적 절차’에 근거하더라도, 그 행위가 법적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건의 핵심은 ‘의도’가 아닌 ‘결과’였다. 즉, 선의로 정리를 진행했어도 그 결과가 유족의 권리 침해로 이어졌다면, 민사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처럼 디지털 장의사의 판단은 고인의 의사, 유족 간의 이해관계, 감정,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얽히는 지점에서 민감하게 작용한다. 제도적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누구든 법적 분쟁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3. 삭제가 아닌 침해로 인식될 수 있는 현실

디지털 장의사가 수행하는 작업 중 가장 민감한 부분은 ‘삭제’다. 지우는 행위는 되돌릴 수 없다. 사진 한 장, 이메일 하나, 메신저의 마지막 대화 기록조차 누군가에겐 상처를 덮는 마무리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반드시 간직하고 싶은 유산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고인의 자녀 간 갈등이 심했던 한 사례에서는, 고인이 생전 작성한 일기장을 디지털 장의사가 삭제한 후, 동생이 형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해당 일기장은 고인의 유언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서였고, 삭제 이후 그 내용은 복구되지 못했다.

 

법원은 이 사건에서 디지털 장의사의 고의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유족 간 분쟁의 존재를 전제로 정리된 점을 고려해 배상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판사는 판결문에 의미 있는 문장을 남겼다.
“고인의 디지털 기록에 접근하는 제3자는 그 행위가 사후 명예와 프라이버시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음을 충분히 인식해야 하며, 삭제라는 행위는 최종적으로 불가역적 결과를 초래하는 점에서 신중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처럼 현재 법은 디지털 장의사의 업무 방식에 대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정리할 권한은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하는가? 유언 없이도 고인의 계정을 정리해도 되는가? 삭제할 항목의 기준은 누가 설정해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은 아직까지 ‘관행’이나 ‘상식’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애매한 기준이 반복되면, 언젠가 그 행위는 ‘기억의 침해’라는 민사적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4. 더 늦기 전에 필요한 기준과 공적 장치

디지털 장의사의 역할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고인의 자산이 오프라인에만 존재하던 시대는 지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SNS, 블로그, 메신저, 유튜브, 클라우드에 수십 년의 삶을 남기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디지털 사망 이후의 문화적 문제이자 법적 문제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디지털 장의사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첫째,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군에 대해 법적으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수행 가능한 업무의 범위, 필요한 유족 동의 수준, 삭제와 보존 판단 기준 등이 제시되어야 한다. 둘째, 고인의 디지털 자산 정리에 앞서 법적 동의서 작성 의무화가 필요하다. 유족 간 갈등을 방지하고, 장의사에게 과도한 민사적 책임이 전가되지 않도록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디지털 유언장 제도의 보편화도 중요하다. 생전 본인이 계정, 파일, 자산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길 원하는지를 명시할 수 있도록 하고, 이 유언이 법적 효력을 갖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현재는 텍스트 파일이나 메모 앱에 유언을 작성해도 효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공공기관이 디지털 장의사 관련 민원과 분쟁을 중재할 수 있는 중립기구를 운영하는 것도 검토해볼 수 있다. 지금처럼 민간 업체에만 맡기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법과 제도가 없는 자리에서는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고, 그 부담은 결국 소송으로 되돌아온다. 이제는 ‘기억의 정리’라는 민감한 과업을 개인의 판단에만 맡겨둘 수 없는 시대다.